로마 제국의 역사는 영광과 비극이 공존하는 드라마틱한 서사로 가득합니다. 그 중에서도 게타와 카라칼라 형제의 이야기는 권력과 질투, 형제애의 붕괴가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이 두 형제의 통치 기간은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어두운 순간 중 하나로, 그 여파는 제국의 근간을 뒤흔들었습니다.
세프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유산
게타와 카라칼라의 이야기는 그들의 아버지인 세프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로부터 시작됩니다.
세베루스는 군인 출신 황제로,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제국을 안정시키고 확장했습니다. 그는 두 아들 모두에게 제위를 물려주고자 했는데, 이는 로마 제국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습니다.
세베루스는 임종 직전 두 아들에게 "형제가 서로 아끼면서 사이좋게 제국을 통치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다 무시해도 좋다. 그러나 병사들을 우대하고,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 말은 후에 로마 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형제의 성장과 갈등의 씨앗
카라칼라(본명 바시아누스)와 게타는 어릴 때부터 매우 다른 성격을 지녔습니다.
카라칼라는 호전적이고 충동적인 성격이었던 반면, 게타는 온화하고 지적인 면모를 보였습니다. 이러한 성격 차이는 그들이 성장함에 따라 더욱 두드러졌고, 결국 치명적인 갈등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두 형제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원정에 동행하며 군사 경험을 쌓았습니다. 특히 카라칼라는 군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는데, 이는 후에 그의 권력 기반이 됩니다.
공동 통치의 실패
211년 세베루스 황제의 사망 이후, 카라칼라와 게타는 공동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공동 통치는 처음부터 불안정했습니다. 두 형제는 정책부터 개인적인 취향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의견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두 형제는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통치하는 방안까지 고려했다고 합니다. 이는 로마 제국의 분열을 의미하는 것으로, 당시 원로원과 군대의 강한 반발을 샀습니다.
카라칼라의 극단적 선택
결국 카라칼라는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212년 12월, 그는 어머니 율리아 돔나의 방에서 게타를 만나자고 제안했고, 그곳에서 미리 준비해 둔 근위대를 동원해 게타를 살해했습니다.
게타는 어머니의 품에 안긴 채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지며, 이 사건은 율리아 돔나에게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았습니다.
카라칼라는 이후 게타의 지지자들과 그의 가족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숙청했는데,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이때 약 2만 명이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기록 말살형 (Damnatio Memoriae)의 시행
카라칼라는 게타 살해 이후 'Damnatio Memoriae'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는 게타와 관련된 모든 기록, 동상, 화폐 등을 파괴하고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금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고대 로마에서 최악의 범죄자들에게만 적용되던 처벌이었습니다.
카라칼라의 이런 행동은 로마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그의 잔혹성을 더욱 부각시켰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게타의 이름이 지워진 비문들이 발견되고 있어,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게타의 얼굴이 지워진 그림 |
카라칼라의 통치와 로마의 변화
1. 대규모 숙청 작업
2. 군대에 대한 대대적 보상
3. 안토니누스 칙령 (Constitutio Antoniniana) 발표
4. 대규모 건설 사업 추진
카라칼라 목욕탕 |
5. 종교 정책의 변화
6. 화폐 가치 하락
7. 동방 정책 강화
그러나 카라칼라의 군사 활동은 대부분 실질적인 성과 없이 막대한 비용만 소모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특히 게르만 전선에서의 전투는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카라칼라가 적군 포로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면서 그의 잔인한 면모가 다시 한 번 드러났습니다.
8. 법률 체계의 변화
카라칼라의 최후
카라칼라의 폭정은 결국 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립니다.
217년, 동방 원정 중이던 카라칼라는 근위대장 마크리누스가 주도한 암살 음모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카라칼라가 자신의 운명을 어느 정도 예감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점성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징조를 느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고, 결국 화장실에서 암살자의 칼에 쓰러졌습니다.
또 다른 얘기로는 기도를 위해 이동 하던중 길가에서 급하게 소변을 보던중 평소 앙심을 품고 있던 마르티알리스에게 살해를 당하였고,정작 마르티알리스는 평소 황제를 죽이자고 같이 얘기하던 마크리누스에게 현장에서 화제 시해점으로 즉결 처분당했다고 합니다.
또 다은 정사에서는 술 먹는 회식자리에서 퇴직금을 주지 않는것에 불만을 품을 병사에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때 카라칼라의 나이는 겨우 29살 이었습니다.
게타와 카라칼라가 남긴 유산
게타와 카라칼라 형제의 비극은 로마 제국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권력에 대한 과도한 욕망과 형제간의 불화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고로 남았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로마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하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습니다.
카라칼라의 과도한 군사 지출과 무리한 정책들은 제국의 재정을 악화시켰고, 그의 폭압적인 통치는 사회적 불안을 증폭시켰습니다.
결론: 역사의 교훈
게타와 카라칼라의 이야기는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권력, 질투, 형제애, 그리고 통치자의 책임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들의 비극적인 운명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아 우리에게 과거의 교훈을 상기시키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지혜를 제공합니다.
권력의 남용과 개인의 욕망이 어떻게 한 제국을 몰락의 길로 이끌 수 있는지, 그리고 가족 간의 갈등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이 이야기는, 오늘날의 지도자들과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